준(June),어디가니?
- SK텔레콤 준(June) 서비스를 통해 살펴보는 IT비즈니스의 신경향
1. 준, 영화를 보여줘
지난 12월, TV와 신문지면, 지하철 광고판에서 낯선 광고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이 광고는 준(June)이라는 이름에 대한 상당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SK텔레콤의 휴대폰 멀티미디어 서비스로 밝혀진 이 준(June)이라는 브랜드의 등장은 뭔가 심상찮은 조짐을 내포하고 있다. SK텔레콤이 기존 무선인터넷 서비스 브랜드로 키워오던 네이트(NATE)를 새로 개편하는 동시에 ‘준’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휴대폰으로 즐길 수 있는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추가하려 했다면 굳이 기존의 네이트와는 다른 새로운 브랜드에 거액을 투자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 네이트와 준의 홈페이지 첫 화면. 대비되는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SK텔레콤은 왜 굳이 ‘준’이라는 새 브랜드를 내세웠을까. 또 앞으로 ‘준’과 네이트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될까.
두 브랜드는 앞으로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무선인터넷 브랜드의 이미지가 강했던 네이트는 앞으로 ‘유선 인터넷 포털 사이트’로 변신할 전망이다. 네이트가 최근 메신저 서비스를 강화하는 것도 무선 보다는 유선 포털 사이트로서 기능이 강화됐기 때문이라는 분석.
반면 ‘준’은 지금까지 나온 무선 인터넷 서비스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개념의 무선 인터넷 브랜드를 목표로 한다. ‘준’은 무선 인터넷의 주요 콘텐츠였던 뉴스 및 생활정보 등을 과감히 빼는 대신 가수와 영화 콘텐츠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문화 콘텐츠를 휴대전화 단말기를 통해 소비자에게 본격적으로 공급하겠다는 의지인 셈. SK텔레콤의 이런 의도가 적중한다면 휴대폰은 더 이상 ‘전화기’가 아니라 문화 콘텐츠를 공급받는 혁신적인 단말기로 거듭날 전망이다.
2. 콘텐츠와 네트워크의 결합
과거 AOL과 타임워너의 합병 때 사람들은 이 대사건을 “콘텐츠 사업과 통신망 사업체의 역사적인 조우”라고 칭송했다. 미국 최대의 통신망을 갖고 있는 AOL과 세계에서 가장 큰 언론 재벌 가운데 하나인 타임워너와의 만남은 정보통신(IT)비즈니스의 겉모습 자체를 송두리째 뒤흔든 역사적 사건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합병 AOL-타임워너는 그다지 '역사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실적은 기대에 못 미쳤고 합병 이후 시너지 효과도 거의 없었다는 평가다. 끝을 모르고 추락하는 이 회사의 주가에 대해 낙관론자들은 아직도 “서로 다른 기업문화를 갖고 있는 두 구성원이 서로를 이해하게 될 때까지의 과도기”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현실만 놓고 본다면 AOL과 타임워너의 합병은 분명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어느 산골 고갯길을 상상해보자. 이 고갯길은 한양으로 올라가는 외길이라,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넘는다. 이 고개 마루에는 주막이 하나 있었고 주막주인은 지나는 사람들로부터 큰 돈을 벌어들였다.
이 주인이 하루는 생각을 해보니 고개를 넘는 과객들을 상대로 술과 함께 재미있는 탈춤을 보여주면 큰 인기를 끌 것 같았다. 그는 곧 유명한 사당패를 불러 1년 내내 주막에서 탈춤을 추게 했다. 술과 춤을 동시에 팔게 되니 주막주인으로서는 최고의 장사 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고갯길 근처에 훨씬 지나다니기 쉬운 길이 새로 뚫렸다고 가정하자. 사람들은 그 고갯길을 버리고 모두 새로 생긴 길을 이용할 것이다. 이제 주막의 매출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사람들 많은 곳으로 떠돌아 다녀야 할 사당패까지 주막에 붙잡혀 함께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AOL과 타임워너의 합병이 시너지를 내지 못했던 것은 AOL이라는 존재가 마치 사람들이 떠나간 주막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AOL은 주로 전화선을 이용한 통신망(PSTN) 과 느린 ISDN망에 의존하는 회사. 비록 이 회사가 미국 최대의 통신서비스 회사이긴 했지만 사실 해마다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초고속 통신망 구축에서는 다른 회사에 비해 한 걸음 뒤쳐지는 상황이었다. 타임워너의 콘텐츠는 여전히 인기가 있었지만 이미 구식 네트워크가 돼버린 AOL이 이 콘텐츠를 잘 유통시키지 못한 셈이다.
콘텐츠와 네트워크의 결합은 양쪽의 기능이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다. 만약 이 조건이 만족된다면 한양 가는 외길에 주막을 열고 술과 춤을 독점하는 주막주인처럼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SK텔레콤의 준은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3. 준의 성공 가능성
AOL 타임워너와 달리 SK텔레콤은 첨단을 달리는 무선통신 사업체다. 한국에서는 핸드폰 안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무선 통신이 널리 보급됐다. 그러나 정작 콘텐츠를 운반하는 수단으로서의 무선 통신 서비스는 이제 막 시작단계에 불과하다. 휴대폰 액정이 컬러로 바뀌고 동영상을 재생할 수 있을 정도로 처리용량이 늘어난 것은 국내에서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AOL 타임워너와 달리 SK텔레콤과 준은 기본적으로 최첨단 네트워크와 콘텐츠 비즈니스의 결합이라는 바람직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또 SK텔레콤은 콘텐츠 비즈니스 사업 역량을 넓혀가는 방법으로 직접 콘텐츠를 만들고 유통하는 방식을 택했다. 국내에 타임워너와 같은 수준의 콘텐츠 사업체가 없는 탓도 있지만, 무선 네트워크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SK텔레콤을 직접 콘텐츠 사업에 뛰어들도록 만들었다는 평가다. SK텔레콤의 막강한 현금 동원력과 기획력을 감안할 때 준의 미래는 매우 밝아 보인다. 거대 통신기업 SK텔레콤이 IT비즈니스의 시작부터 발끝까지 점령하게 될 날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하지만 무선통신이라는 미디어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핸드폰의 작은 화면으로 두 시간 동안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런 한계 탓에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휴대폰이 콘텐츠 유통의 주류가 되기는 어렵다고 봐야 한다.
최근 하나로 통신이 두루넷을 인수하는 등 국내 초고속 통신망 사업자 간에 활발히 이뤄지는 구조조정 움직임은 이런 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로와 두루넷을 합치면, 역시 국내 초고속 통신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거대 업체가 된다. 또 두루넷에는 코리아닷컴이라는 미완의 대기가 숨어있다.
그러나 초고속 통신망에서 콘텐츠 비즈니스 사업은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코리아닷컴이 설립 초반 맹공을 퍼부었는데도 포털사이트로서 아직 입지를 다지지 못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유선 통신망에서 독점력을 발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로통신-두루넷 합병 법인이 하드웨워 기반을 배경으로 콘텐츠 유통산업에서 독점력을 발휘하게 된다면 아직까지 전적으로 무선에만 기반을 두고 있는 SK텔레콤이 콘텐츠 유통산업에서 주도권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반면 하나로-두루넷 합병 법인이 유선네트워크 콘텐츠 사업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유무선 양면에서 극단적인 확장을 시도 중인 SK텔레콤이 국내 IT산업 전반을 지배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온/오프라인이 따로따로 각자의 비즈니스를 진행하던 시대는 끝났다. 양자가 결합을 이뤄낸 사업방식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독자적인 생존력을 확보한 사업체라도 온라인이나 오프라인 어느 한 방식에만 기반을 두고 있다면 양쪽을 모두 갖춘 기업과 경쟁을 할 수가 없다.
안터넷 상거래 업체도 백화점, 할인점 등의 강력한 오프라인 기반을 갖고 있는 후발 업체들에 의해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콘텐츠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준(June)의 등장을 단순히 과거 유사한 광고방식을 택했던 '선영아 사랑해' 수준으로 인식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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